나는 문득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읽고, 출근을 준비하던 나의 일상이 완전히 뒤바뀌는 그런 상상. 움직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면?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된다면? 오로지 햇빛과 공기, 물만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인간이 식물처럼 살아간다는 말은 단순히 몸이 가만히 있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 구조, 사회 시스템, 인간관계, 심지어 정체성까지 완전히 재편된다는 말과도 같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움직이고, 먹고, 경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식물처럼 살아가게 된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까? 광합성으로 에너지를 얻고, 움직임은 최소화되며, 생태계의 일부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그런 인간을 상상해보자. 말도 안 되는 상상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바로 그 '말도 안 됨'이야말로 우리 상상력의 진짜 시작점이다.
광합성으로 에너지를 얻는다면 - 에너지 구조의 전환
지금 나는 하루 세 끼를 먹는다. 때로는 그 이상. 우리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기본 행위이며, 동시에 문화, 취향, 사회적 관계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식물처럼 광합성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면 어떨까?
광합성은 식물이 빛, 이산화탄소, 물을 이용해 포도당을 생성하는 생화학적 과정이다. 식물은 이를 통해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고, 잉여는 성장에 사용한다. 인간이 이러한 과정을 할 수 있으려면, 우선 엽록소와 엽록체 같은 구조를 몸 안에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피부가 그 기능을 대체할 수 있을까? 광합성이 이뤄지는 조건은 ‘빛’, ‘물’, ‘이산화탄소’, 그리고 ‘적절한 효소 환경’이다. 따라서 이런 인간은 매일 햇빛을 받고 수분을 섭취하며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입해야 생존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이것이 가능하려면 유전공학의 엄청난 발전이 필요하다. 2016년 사이언스 저널에는 광합성 능력을 가진 박테리아 유전자를 다른 생물체에 이식하는 실험이 소개되었다. 현재로서는 미생물 수준이지만, 생명공학의 진보로 이 능력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상상은 그리 먼 미래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광합성 인간은 더 이상 식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백질 보충이나 소량의 미네랄 섭취는 외부 보조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인 생존 에너지는 햇빛에서 온다. 이는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음식물 쓰레기가 사라지고, 냉장고가 필요 없어지며, 음식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생존을 위해 누구나 공공의 태양 아래 평등하게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들이 생길까? 빛이 부족한 환경, 예를 들어 북유럽이나 도심의 고층건물 그림자 속에 사는 사람들은 생존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생존 능력이 달라지는 이 시스템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계층을 낳을 수도 있다. 조명을 독점하거나, 햇빛을 가리는 구조물에 대한 논쟁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건축, 도로 설계, 패션 등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노출이 많고 빛을 잘 흡수할 수 있는 의복이 필요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공동주택이 주목받는다. 도시의 전력 소비는 줄지만, 태양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경쟁은 심화된다.
광합성 인간 vs 현재 인간 (에너지 구조)
항목 | 현재 인간 | 광합성 인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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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공급원 | 음식 섭취 | 햇빛, 공기, 물 |
소화 기관 | 위, 장기 등 복잡 | 단순화되거나 축소 |
식비 | 월 평균 30~100만원 | 거의 없음 |
생존 조건 | 식량 확보 | 일조량, 대기질 |
움직일 수 없다면 - 존재 방식의 재정의
아침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점심엔 걸어서 식당에 가고, 저녁엔 헬스장에서 뛰는 삶.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식물처럼 이동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식물은 '정착 생물'이다.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생애를 마친다. 움직이지 않는 대신, 식물은 환경에 대한 반응성과 적응성이 높다. 인간에게 이러한 정착성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직업, 주거, 교육, 사회 시스템을 모두 다시 설계해야 할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인간은 육체노동을 할 수 없다. 농사, 건축, 운송 등 대부분의 경제 활동이 불가능해진다. 반면, 온라인 기반의 지식노동, 콘텐츠 제작, 사유 중심의 창작 활동은 더욱 가치 있게 여겨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대한의 성장을 이루어야 하며, 물리적 거리보다 '정보 접근성'이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인간관계 역시 급격히 변화한다. 우리는 더 이상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이사’를 고려해야 할지도 모른다. 결혼은 '같은 장소에 뿌리내릴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디지털 네트워크 기반 공동체가 등장할 수 있다.
신체 구조도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 다리나 발의 기능이 축소되고,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이 발달할 수 있다. 몸의 형태가 직립에서 펼쳐진 구조로 바뀌며, 햇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넓은 형태의 신체 구조가 선호될 수 있다.
기술은 이런 인간을 위해 어떻게 변화할까? 모든 활동이 ‘비이동’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물류는 드론과 로봇이 맡게 되며, 생활 필수품은 자동공급 시스템으로 해결된다. 교육은 가상현실에서 이뤄지고, 노동은 뇌파로 컨트롤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한다.
이처럼 움직일 수 없다는 단점은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움직이는 존재’로서가 아닌 ‘존재 자체’의 의미가 중요해지는 세상. 과연 그런 삶에서도 우리는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태계의 일부로 산다는 것 - 조화의 삶
마지막으로 상상해볼 시나리오는 인간이 생태계의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는 모습이다. 광합성을 하며 고정된 위치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생태계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현재의 인간은 생태계 내에서 '최상위 소비자'이다.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으며, 자연의 자원을 끊임없이 추출해 이용하고 파괴한다. 하지만 식물형 인간은 이 위치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더 이상 육식을 하지 않고,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으며,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존재가 된다.
이는 탄소배출의 혁명적 감소를 의미한다. 인간이 더 이상 공장과 에너지 소비를 기반으로 생존하지 않기 때문에, 기후위기의 핵심인 온실가스 배출이 줄어든다. 대기 오염, 수질 오염, 토양 황폐화 문제도 점차 개선된다.
또한 식물형 인간은 주변 생물과의 공존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동물들에게 먹이 제공이나 산소 공급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자연과 인간은 갈등이 아닌 '순환과 교류'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변화는 도시 설계, 정책 방향, 교육 철학 등 모든 시스템에 영향을 준다.
이제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 더 이상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학교에서는 '환경윤리'가 아닌 '환경공존기술'을 가르치고, 기업은 친환경을 넘어서 ‘자연 모방’과 ‘생태기반 생산’을 추진하게 된다.
우리의 존재 이유도 달라질 것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태계에 가치를 더하기 위한 존재. 이 상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이는 오히려 인간 본질에 가까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는 인간이어야만 할까?
광합성을 통해 살아가고, 움직이지 않으며, 생태계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삶. 그것은 기술과 철학, 사회 시스템 모두의 재정립을 요구하는 상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든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에너지 소비, 빠른 이동, 경쟁 중심의 구조는 과연 ‘필연’이었을까?
인간이 식물처럼 살아간다는 말은, 결국 우리가 조금 더 자연에 가까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것이 실제로 실현되지 않더라도, 그런 상상이 지금의 문명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은 충분하다.
당신은 어떠한가? 만약 지금 당장 햇빛 한 줄기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삶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