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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 감성 SF · 다양성 · 우주적 질문

by 생각의 잔상 2025. 8. 1.

감성 sf 관련 사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2019년 출간 이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김초엽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은 과학소설(SF)의 형식을 빌려오면서도 인간 내면의 감정, 정체성, 관계에 집중하는 독특한 스타일로 한국 SF 문학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SF 장르가 오랫동안 이성적이고 기술 중심의 이야기를 선보였다면, 김초엽의 세계는 감성과 사유, 존재론적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제목부터 상징적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말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물리적 한계에 대한 인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고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애틋한 감정이 담겨 있다. 본문에서는 감성 SF라는 독특한 문학 장르로서 이 책이 갖는 의미, 다양한 존재에 대한 포용적 시선, 그리고 우주적 시공간 안에서 던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감성 SF

김초엽 작가는 SF 장르를 통해 인간 내면을 탐색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과학 기술은 주요한 배경이자 설정으로 활용되지만, 그것이 중심 서사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순간의 섬광’에서는 시각 장애를 가진 주인공과 시각 보조 기술을 개발하는 과학자의 관계를 통해 감정과 기억, 상실의 문제를 조명한다. 과학은 인간 경험을 확대하는 장치일 뿐, 진정한 주제는 결국 인간이다. 김초엽은 극적인 사건보다 감정의 미묘한 결을 따라가며, 조용하지만 강한 울림을 남긴다. 이러한 방식은 독자에게 과학보다는 감성을 먼저 전달하고,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자극한다. 그녀의 문체는 매우 서정적이며, 마치 시를 읽는 듯한 정갈한 리듬을 지닌다. 짧은 문장 속에서도 풍부한 이미지와 깊은 사유가 담겨 있으며, 복잡한 이론 없이도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넓게 열어준다. 이는 ‘감성 SF’라는 독자적인 문학 양식을 만들어낸 김초엽만의 강점이며, 감성과 과학이 융합된 새로운 유형의 서사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감성 중심의 SF는 특히 한국 문학에서 드물다. 기존 한국 SF는 하드 SF나 사회비판적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았는데, 김초엽은 오히려 인물 간의 감정적 연결, 내면적 상처, 상실과 회복에 주목한다. ‘감정의 물성’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물질로 측정할 수 있는 세계를 배경으로, 감정이 기술적으로 관리되는 사회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김초엽의 작품은 단순히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고, 현실의 정서적 맥락을 SF라는 장르를 통해 새롭게 재구성한다. 감성과 공감,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녀는 기존 SF 독자뿐만 아니라 문학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다양성

김초엽의 소설이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다양성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녀는 단순히 인종, 성별, 장애 등 표면적인 다양성을 나열하지 않는다. 대신 다중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내면을 조명하며, 이질적인 존재 간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서사에 통합시킨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여성, 장애인, 과학자라는 정체성을 지닌 주인공이 우주 탐사 임무에 참가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작품은 여성이 우주에 나아가는 데 겪는 사회적 제약과 기대, 장애로 인한 신체적 제약, 그리고 과학자로서의 윤리적 고민을 한 인물에게 농축시켜 보여준다. 특히 주인공이 소외된 자가 아니라 서사의 중심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김초엽의 서사 방식은 단순한 ‘대표성’을 넘어서 진정한 포용을 실현한다.

또 다른 작품 ‘스펙트럼’에서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외계 생명체와의 관계를 통해 언어와 감정의 차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 작품은 인류 중심주의적 시선을 탈피하고,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공존이라는 큰 주제로 이어진다. 김초엽의 세계에서는 다름이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독자는 작품 속 인물들과 함께 ‘다름’을 직면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공유하게 된다. 이처럼 그녀는 SF라는 장르의 외연을 활용해 보다 풍부하고 넓은 세계관을 펼쳐 보이며, 문학이 포용할 수 있는 감정과 존재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킨다.

우주적 질문

SF 장르의 본질은 결국 인간 존재에 대한 탐색이다. 김초엽은 우주라는 배경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과 감정을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물리적 거리와 시간, 기술의 한계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갈등과 이해, 그리움과 수용을 정교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 인류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핵심은 ‘귀환할 수 없음’에 있다.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는 결국 고향과 이별하고 그리워하며 살아야 한다. 이러한 설정은 실제 물리학 이론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철학적 질문으로 전환된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과거를 떠나온 우리는 새로운 곳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자문은 우주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더욱 또렷하게 울린다.

김초엽의 작품은 물리학, 생물학, 인지과학 등의 요소를 활용하지만, 그 목표는 과학의 이해를 넓히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녀는 이 과학적 요소들을 이용해 인간의 윤리, 존재, 관계를 묻는다. 우주는 넓고 인간은 작지만, 그 안에서도 인간은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선택한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라는 보편적 질문에 다가가게 만든다. 특히, 그녀의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정답을 주기보다는 함께 사유할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이로 인해 김초엽의 SF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면모를 지니며, 단순한 오락성을 넘어선 문학적 깊이를 가진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의 작품은 현대 한국문학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결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단순한 SF를 넘어선, 인간 존재에 대한 섬세한 사유와 감정의 탐색을 담은 작품이다. 김초엽은 과학을 이야기하면서도 인간의 감정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존재를 포용하며, 우주적 질문을 통해 독자의 생각을 넓힌다. 그녀의 소설은 감성과 사유, 공감을 통해 SF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으며, 한국문학의 감성적 깊이를 과학이라는 언어로 확장시켰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기술과 철학, 감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SF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문학이라는 것을 김초엽은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