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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권여선) – 상실의 흔적 · 미해결 사건 · 감정의 농도

by 생각의 잔상 2025. 8. 5.

레몬 관련 사진

권여선의 소설 『레몬』은 단편적인 미스터리 구조를 기반으로, 감정의 진폭과 상실의 정서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여고생 김해온의 죽음이라는 미해결 사건이 있으며, 이를 둘러싼 유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감정적 반응, 기억의 편차가 다층적으로 교차한다. 이 작품은 단순한 추리나 범죄 소설이 아닌, 감정의 농도가 얼마나 문학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며 독자에게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레몬’이라는 단어 하나에 담긴 다양한 감정의 결은,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상징으로 기능한다. 권여선은 미스터리적 구조 안에서도 정서적 서사를 훼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복잡함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를 유도한다.

상실의 흔적 – 김해온의 부재가 남긴 파문

소설의 시작점은 여고생 김해온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작가는 해온의 죽음을 단순한 범죄의 피해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해온의 여동생 유진은 언니의 죽음 이후에도 그 감정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에 걸쳐 회상과 자기반성을 반복한다. 유진에게 언니는 아름답고 조용한 존재였지만, 동시에 잘 이해되지 않는 거리감 있는 인물이었다.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잃은 사람’의 혼란은 유진의 시선과 감정선 전반에 깔려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상실은 단지 개인적인 아픔을 넘어서, 공동체 안에서 기억되고 망각되는 방식에까지 확장된다. 가족, 친구, 언론, 사회 모두 해온의 죽음을 어떻게든 ‘정리’하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완전히 수용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혜연 역시 상훈이라는 인물과의 애매한 관계 안에서 자책과 회피 사이를 오간다. 그녀는 해온을 친구라 말하지만, 동시에 비교 대상이었으며, 내면적으로 경쟁과 위화감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결국 상실은 해온을 둘러싼 인물 각자의 내면을 마주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결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서 분노, 죄책감, 혼란 등으로 얽혀 있다.

권여선은 해온의 부재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존재는 주변 인물들의 기억과 감정 속에서만 존재하며, 독자는 그들을 통해 해온이라는 인물을 역으로 그려나가야 한다. 이는 상실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정면으로 보여준다. 상실은 '없음' 그 자체보다, 그것이 남긴 '흔적' 속에서 더 또렷이 드러난다. ‘레몬’은 상실의 무게와 그 잔향을, 간접적이면서도 치밀한 심리 묘사를 통해 긴 시간에 걸쳐 그려낸다.

미해결 사건 – 불완전한 진실과 기억의 조각

『레몬』의 중심사건인 김해온의 피살은 결국 해결되지 않은 채 작품이 끝난다. 경찰 수사는 오랜 시간 진척 없이 이어지고, 주요 용의자였던 상훈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다. 이처럼 서사의 구조 자체가 미완성된 사건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을 기다리지만, 작가는 끝내 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는 기존 미스터리 장르의 클리셰를 깨는 방식이며, 동시에 독자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진실을 원하고, 진실은 정말 존재하는가?”

유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니의 죽음을 기억하며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려 애쓰지만, 그녀의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변형된다. 당시 언니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감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거나 왜곡된다. 이처럼 인간의 기억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그 속에서 만들어진 진실 역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혜연의 회상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에 시달리며, 상훈과의 관계에 대해 말할 때마다 서술이 뒤틀리고 모호해진다.

이처럼 『레몬』에서 미해결 사건은 단순한 플롯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이 ‘끝나지 않음’은 등장인물들의 감정 상태, 사회적 망각, 그리고 인간이 가지는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서사적 장치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물들이 영원히 해온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를 통해 독자에게 ‘알 수 없음’을 견디는 감정, 즉 불완전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성찰하게 만든다.

감정의 농도 – 문체와 서사로 빚어진 정서의 결

권여선의 문체는 결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레몬』 전반에 흐르는 서술은 차분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마치 감정조차 억제된 듯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억제된 언어 속에서 감정은 오히려 더욱 강하게 전해진다. 문장 사이의 여백, 설명되지 않는 감정, 직접 묘사되지 않는 장면들이 독자의 상상과 해석을 자극한다. 이는 ‘문체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문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 ‘레몬’이라는 상징은 단순한 과일 그 이상이다. 해온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였던 이미지로, 그녀의 생기, 아름다움, 상처, 이 모든 것을 압축해 담고 있다. 레몬은 신맛이 강하면서도 상큼한 이미지이기 때문에, 이중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마치 해온의 존재 자체처럼, 주변 인물들에게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날카로운 감정의 잔해를 남긴다. 작가는 이처럼 감정의 이중성과 농도를 ‘레몬’이라는 단어 하나로 응축해 표현하고 있다.

또한 『레몬』은 시점의 교차를 통해 다양한 감정의 결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유진의 1인칭 시점은 매우 내밀하며, 독자는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접근할 수 있다. 반면 혜연의 시점은 보다 거리감이 있으며, 상훈에 대한 감정과 자기혐오, 두려움 등이 뒤섞여 복합적인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 두 시점은 하나의 사건을 전혀 다른 감정의 농도로 바라보게 하며, 이는 독자에게 정서적 균형보다는 불균형의 미학을 느끼게 만든다. 감정은 선형적이지 않으며, 권여선은 이 복잡한 감정의 결을 감각적으로 서술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결론

『레몬』은 단순한 사건 중심 서사가 아니라, 감정의 결과 인간의 기억, 상실의 구조에 대해 정교하게 직조된 문학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명쾌한 답을 요구하기보다는, 감정의 여운을 따라가며 각자의 ‘레몬’을 떠올리게 한다. 권여선의 섬세한 문체를 통해 삶의 상처와 감정의 복잡성을 마주하고 싶은 독자라면, 『레몬』은 반드시 한 번은 읽어야 할 현대 한국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사건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의미를 말하고, 감정을 감춤으로써 더욱 진하게 드러낸다. 감정의 농도는 바로 그 억제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