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 사회의 본질을 뼛속 깊이 파헤치는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갑작스러운 ‘백색 실명’이라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도시 전체를 뒤덮으면서, 우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문명이라는 구조물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목격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재난 소설이나 철학 소설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과 사회적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사라마구는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이름조차 명시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 보편적 인간 조건에 대한 탐구를 시도합니다. 이 글에서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핵심 요소인 ‘집단 실명’, ‘문명 붕괴’, ‘인간 본성’을 중심으로 작품의 깊은 메시지를 분석해봅니다.
집단 실명
이 소설은 한 남자가 운전 중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실명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를 돕던 사람들, 그를 진료한 의사, 병원에 있던 환자들까지 빠르게 감염되며 실명의 전염성이 드러납니다. 이는 질병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사회 시스템의 약함, 집단의 공포 반응, 그리고 무지 속의 혼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설정입니다. 사라마구는 독자에게 “보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시각의 상실이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실명을 처음 겪은 사람들의 공포는 극심합니다. 가족 간의 신뢰는 붕괴되고, 정부는 이들을 감염자로 취급하여 강제 격리 조치를 시행합니다. 눈먼 사람들은 ‘병자’나 ‘범죄자’가 아니라 단지 운 없게 실명을 당한 평범한 시민들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이들을 분리하고 격리소에 수용합니다. 그 안에서 점차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격리소 내부는 빠르게 무질서한 상태로 전락합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위협이 되기 시작하며, 본능적인 공포가 이성보다 우위에 놓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이기심과 불신으로 반응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문명 붕괴
소설이 전개되며 실명의 확산은 한 도시를 넘어 국가 전체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정부는 더 이상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경찰은 무장한 채 실명자들을 감시할 뿐 도움을 주지 않고, 병원과 공공기관은 이미 붕괴된 상태입니다. 격리소 내부는 ‘작은 사회’의 축소판이 되며, 그 안에서 권력 구조와 폭력이 생겨나고, 사회가 의존해왔던 윤리적 규범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특히, 총을 소지한 한 무리가 식량을 독점하고 여성들을 성적 도구로 삼는 장면은 충격적입니다. 이는 인간이 법과 도덕 없이 놓였을 때, 얼마나 쉽게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라마구는 이러한 설정을 통해 문명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단한 구조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그는, 문명이란 얇고 쉽게 찢기는 막에 불과하다고 경고합니다. 인간이 서로에 대한 연대, 책임, 공감 등의 가치를 잊고 본능과 생존에만 매달릴 때, 우리가 믿어왔던 질서와 윤리는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또한, 사라마구는 문명이 붕괴된 이 세계에서 희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명 밖에서도 최소한의 도덕성과 공동체 의식을 지키려는 인물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다움이란 외적 조건이 아닌 내면의 윤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인간 본성
이 소설의 핵심은 바로 ‘인간 본성’입니다. 사라마구는 실명이라는 설정을 통해 인간 본성을 철저히 해부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드러나는 것은 선한 본성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는 본능, 타인을 착취하려는 욕망, 그리고 도덕이 사라진 공간에서 생기는 새로운 위계 구조입니다. 실명 상태에서 벌어지는 온갖 비윤리적 행위들은,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인간의 악한 본성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 중심에는 유일하게 실명을 하지 않은 인물, ‘의사의 아내’가 있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눈이 보이지만 이를 밝히지 않고, 다른 이들을 돕는 데 자신을 헌신합니다. 그녀는 공동체의 윤리적 중심이자,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희망의 상징입니다. 그녀는 보는 자로서의 책임을 감수하며, 절망의 공간 속에서도 인류애를 실천합니다. 그녀의 존재는 독자에게 ‘보는 자’가 단순한 감시자가 아니라, 행동하고 보호하는 이가 되어야 함을 암시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이 가장 밑바닥에 처했을 때 드러나는 ‘진짜 얼굴’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고 나누며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제시합니다. 사라마구는 인간이 언제든 타락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면서도, 인간이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과 이타심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소설의 결말에 가까워지면서 등장인물들이 실명을 회복하는 장면은, 물리적인 시력의 회복이 아닌 ‘진실을 보는 능력’을 되찾았음을 상징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단지 어두운 미래를 경고하는 작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지, 어떤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사라마구는 이 소설을 통해 “눈을 잃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책임을 잃는 것이 진정한 실명”임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도 어쩌면 이미 보지 않으려는 선택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결론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단순한 재난 소설이 아닙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집단 실명이라는 상징을 통해 인간성과 문명의 기반을 해체하고,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보여줍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지금의 사회 시스템과 인간관계를 되돌아보게 되고, 더 나아가 진정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