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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천명관) – 시대 서사 · 거대한 여성 · 한국 현대사

by 생각의 잔상 2025. 7. 30.

고래 소설 관련 사진

천명관의 장편소설 『고래』는 한국문학에서 보기 드문 거대 서사로, 개인의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비틀고 재구성한 대표적 작품이다. 이 소설은 특히 '시대 서사', '거대한 여성', '한국 현대사'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분석할 때 그 가치가 명확히 드러난다. 『고래』는 단지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구조, 권력, 자본주의, 그리고 시대의 욕망과 폭력성까지 포괄하는 문학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작가 천명관은 서사의 기법과 인물 구성, 그리고 풍자적 장치를 통해 문학이 현실을 해석하고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시대 서사

『고래』는 일반적인 성장 서사나 인물 중심의 이야기와 달리, 한 개인의 인생을 통해 시대 전체의 분위기와 변화를 서사화한다. 이 작품은 금복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되, 그녀가 살아가는 공간과 마주하는 사건들을 통해 시대의 격동기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근현대사가 작품의 배경이 되며,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권위주의 정치와 지역 격차, 그리고 계층 이동의 환상까지 모두 녹아 있다. 금복이 세운 극장은 단순한 오락 공간이 아니라, 당대 대중의 꿈과 환상을 담아낸 상징적 공간이다. 극장의 흥망성쇠는 곧 산업사회의 성장과 붕괴를 반영하며,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시대의 구조에 포섭되고 소외되는지를 보여준다. 작품은 연대기적 흐름을 따르지 않고, 인물의 기억과 회상을 중심으로 파편화된 이야기를 조립한다. 이러한 구조는 시대 자체의 불안정성과 반복, 왜곡을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서사 안의 인물들은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설계하기보다, 사회적 조건과 타인의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린다. 천명관은 이처럼 단일한 영웅 서사가 아닌 집단적 경험의 기록을 통해, 문학이 시대를 증언하고 재구성하는 장르임을 보여준다.

거대한 여성 

『고래』의 가장 두드러진 문학적 성취 중 하나는 주인공 금복이라는 인물이다. 금복은 육체적으로도 크고 강한 여성으로 묘사되며, 그녀의 ‘거대함’은 단순한 신체적 특징을 넘어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그녀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며, 가족과 공동체, 자본과 권력이라는 구조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 고아로 버려졌지만, 장돌뱅이와 함께 전국을 떠돌며 장사의 기술을 배우고, 이후 마술사와 만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금복은 남성 없이도 생계를 책임지고,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일궈내며, 한 도시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결코 일방적인 성공 서사가 아니다. 그녀는 수차례 실패를 겪고, 사랑에 배신당하고, 자본에 휘둘리며, 딸 춘희와의 관계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천명관은 금복을 단순한 영웅이나 희생자로 그리지 않는다. 그녀는 현실과 싸우는 동시에, 현실을 상징화하는 존재다. 금복의 거대함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시대의 무게를 형상화하며, 그녀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시대와 투쟁하고 있는 하나의 전선으로 기능한다. 거대한 여성 금복은 한국문학에서 보기 드문 여성 주체의 확장된 형상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우화적 존재이다. 이는 남성 중심적 서사의 관습을 깨뜨리고, 여성 중심의 문학적 주체성과 그 가능성을 확장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

『고래』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대신, 한국 현대사를 이루는 무수한 요소들을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안에 융합한다. 이 과정에서 천명관은 리얼리즘적 기법보다는 환상, 패러디, 해학, 과장 등의 문학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금복의 극장은 실제의 물리적 공간이자, 한국의 근대화 욕망이 응축된 장소이며, 마술사는 기적을 연출하는 인물이자 현실의 부조리를 포장하는 도구이다. 이런 설정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기보다는, 그것을 왜곡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특히 소설 속 고래는 단지 동물이 아닌, 인간의 욕망, 본능, 파괴 충동 등을 상징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천명관은 실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암시하거나 은유로 처리함으로써 독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이처럼 『고래』는 한국 현대사의 단선적인 서술을 거부하고, 복수의 시선과 해석 가능성을 열어두는 텍스트다. 천명관은 마치 설화나 민담처럼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그 속에 사회 비판과 역사적 통찰을 녹여낸다. 이는 문학이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도구가 아니라,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판하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고래』는 그 자체로 역사 서술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방법론인 셈이다.

결론

『고래』는 단순한 장편소설을 넘어, 시대와 여성, 역사라는 세 가지 거대한 축을 통합한 문학적 실험이다. 천명관은 이 작품을 통해 문학이 개인의 삶을 넘어 시대를 통찰하고, 억눌린 목소리를 재현하며, 기억과 상상력의 장을 확장하는 도구임을 증명한다. 『고래』는 그 자체로 읽고 해석해야 할 하나의 ‘역사’이며, 문학적 우화다.